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야마자키 후미오 / 김대환 옮김. 잇북.
p.18
그는 자신이 이미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다시 말해 버려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사들이 불러도 순순히 눈을 뜨지 않자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꽤 심각해졌어, 점적 주입량을 늘려야 할 것 같군.”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뭘 하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냥 빨리 편하게 갈 수 있게 해줘!
너희들 맘대로 내 몸을 주물러대지 말란 말이야.’
‘이제 어찌 되든 좋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어차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사회사업가는 의사들과 같이 그 사람의 의사를 듣지 않고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중 하나로 보는 것은 아닐까요?
일로써 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p.19
그 무렵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금도 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요도에 카테터가 삽입되었고, 엉덩이에는 하루 종일 종이 기저귀가 채워지게 되었다.
또 욕창을 예방한답시고 기계적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는 바람에
고통이 이루 말할수 없었지만 기관이 절개되어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무 말도 못하는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머릿속만 온전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도 고통과 굴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몰아붙이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 사람을 기계처럼 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야 합니다.
사회사업의 근본적 가치가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이니까요.
거기엔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경외도 애도의 마음도 없다.
그저 일분일초라도 환자의 목숨을 더 연장시키려고 하는,
연명지상주의의 현대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의 의무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p.45
우리는 정말 의무감만으로 일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에 대한 배려와 경도, 애도의 마음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봅니다.
p.86
1인실로 옮기고 나서 성실하고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신음하면서도 잘 참아내던 그가 벌벌 떨면서
오로지 진통제 주사만을 기다리는 비굴한 남자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의 눈의 그때까지의 평온한 빛을 잃고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르신이 복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병 걸리게 만든 것이 우리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좋다 좋다 하면서 대신 해주니 나약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성실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도 좋다 좋다 하면서 대신해주면 나약해 지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우리 주변의 사회적(상황적)약자 들이야 더 쉽게 나약해 지지 않을까요?
진통제 주사 기다리듯.. 우리의 서비스만을 기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다 해주어야 되는 사회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할 능력도 안됩니다. 자신도 없습니다.
p.115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 시스템 아래에서 기계적으로 취급되어가,
익숙하지 않은 검사에 벌벌 떨면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등의 굴욕적인 생각이 들어도
‘병이 나을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며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관장님 하시는 이야기가 사회복지관의 문턱이 높다 하십니다.
인정합니다. 성한 사람도 드나들기 어려워 하는 복지관,
어쩌면 최후의 선택으로 복지관 문턱을 넘을 수 도 있습니다.
우리야 편하게 오고갈 수 있는 곳이라 하지만.. 그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온갖 척도, 기준, 평가로 당사자를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굴욕적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p.125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정 들고 애착이 가는 환경에서 보낼 수 있다면,
환자를 위해 일부러 환경을 조성할 필요는 거의 없다.
가족들은 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제 대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 잔의 포도주를 따라 줄 것이다.
집에서 만든 수프라면 그 냄새에 식욕을 느낀 그가 몇 모금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수프 한 모금은 어쩌면 그에게 어떤 영양제보다도 훨씬 더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이 한 구절은 내가 의사가 되고 나서 배운, 또 당연한 것으로 알고 시행하던,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일분일초라도 연장 시켜려는 의료 행위에 대한 통력한 비판이었다.
그 분의 삶을 생각합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좋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으로서 그 분의 삶을 도와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있다 하더라도..
좋은 것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그 분의 삶에서 잘 활용될 수 있는 것으로 도와야겠습니다.
그래야 일상이 되고 평안해집니다.
그래야 우리도 쉽고 편하게, 평안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을 일분 일초만 좋게 할 것인가요?
지금 당장의 문제만 해결하는데 급급할 것인가요?
물론 그럴때도 필요하겠시지만 가급적 그 삶으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겠습니다.
p.191
그녀는 투병 과정에서 악화 되어가는 병세와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헛된 격려에 농락당한 끝에 발광 직전까지 몰려 패닉 상태가 되었다.
더구나 진실을 알고 난 후에는 주로 분노 때문에 모든 외계와의 교류를 거부했지만,
원래 자립적으로 살아온 그녀는 스물네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그녀는 진실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지만
의지를 표명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 의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실현되었다.
당사자의 자주성을 외칩니다.
그렇게 해보자 이야기 하지만 결국 당사자 몰래 각종회의 합니다.
그 분들의 삶을 이런 저런 척도로 재단하고 평가합니다.
당사지 몰래...
그분들이 하시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요..
p.280
환자의 죽음이 환자의 것인 이상 어떤 태도로 여생을 보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할지는 결국 환자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몫으로 돌려 드려야 합니다.
무책임 하게 돌려드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그렇게 할 수있도록 지원해야 겠지요.
반쯤 읽었을 때는 분노, 후회가 있었고,
다 읽었을 때는 사람다움에 대해서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다움...
죽음에서조차 선택은 당사자 자신에게 달려 있어야 함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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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이라면
당연히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