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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중/춘의소식지

소식지 참고글 - 원미산

by 사회사업가, 현환 2007. 1. 4.

원미산은 멀미산, 멀뫼, 장대산, 둔대산(일명 춘덕산), 벼락산, 포대산 등으로 불리우고 있는 부천의 주산 중의 하나이다.

 

원미산이라 불리게 된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옛날 부평부 관아(현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산동 소재)의 동헌에서 이 산을 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데 아침 해돋이 때의 산세는 그지없이 선연하고 아름다우며 해질녘 노릉에 반사된 그 푸르름은 단아하기가 비길데 없었습니다.

 

더욱이 부천벌(현 부천신시가지)을 굽어 감싸는 듯한 정경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멀리서 바라본 산 풍경에 누구나 감탄했다 합니다. 이에 도호부사가 산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부사가 그 즉시 산 이름을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산'의 뜻인 원미산(遠美山)이라 지어 오늘날까지 원미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은 형태에 의한 유래로, 1918년에 나온<조선지지자료>에 의한 것인데 이 산의 형태는 '멀리서(遠) 보면 사람의 눈썹(眉)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기 때문에 원미산(遠眉山)이라 표기하였다는 것입니다.

 

원미산에는 세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주봉은 북동쪽에 위치하여 장좌봉 또는 둔대산이라 부르고 있고, 소명여중고와 성가병원 후면에 위치한 봉우리는 선연하고 아름답다는 멀미봉(멀미산)입니다. 멀미봉 북쪽에 있는 뾰쪽산이 벼락산입니다.

 

장좌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두개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왼쪽 골짜기를 작은 망골이라 하고, 오른쪽을 큰 망골이라 부릅니다.. 이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개울이 있습니다. 이 개울을 '비릿내' 또는 '비리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장좌봉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큰 전투가 있었음을 엿볼 수 가 있습니다,.

 

둔대란 글자 그대로 '병사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비릿내란 명칭의 유래는 '큰 망골과 작은 망골에서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숱한 인명치해로 많은 피가 흘러내려 오래도록 피비린 내가 났다.'해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원미산은 지리적으로 부평관아와 가깝게 위치한 계양산, 원미산 남쪽에 위치한 성주산의 줄기따라 버티고 있는 소래산, 그리고 행주산성과의 중간에 위치하여 부평벌과 김포벌 그리고 부천벌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원미산 보다 더 먼저 기록에 나오는 또 다른 이름인 둔대산이란 명칭이 이를 반영합니다. 그에 대한 고증은 벌응절리<죽산 박씨 대동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죽산 박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조선 때의 명장이며 충신인 김종서의 사위 계공랑 박금손의 후손인 승의랑 박철정 때부터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 휘하에서 싸웠으며 그의 아들인 진은 의병으로 둔대산에서 싸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진이 병사와 노복 1백명과 이웃 마을 장정 100명 등 200명으로 음력 9월 9일 둔대산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계양산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마을을 약탈한다는 파발이 와 돌격하여 왜군 10여명을 죽이고 주력부대를 30~40리나 퇴각시켰다고 적고 있습니다.

 

현재 모역 입구 산 기슭에는 '의병장 박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승지였던 둔대산 입구 약수터에는 '의병장 박진 전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출처 │ 바로보는 부천사 「재미있는 부천이야기」中..